예수원칼럼

누구든지 자기보다는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


우리의 믿음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장’을 주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생명력과 성장의 증거는 변화입니다. 변화만이 믿음의 정체와 상태를 확인하게 해 줍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이라면 또한 ‘성장 멈춤’’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죽기까지 생명력 있는 성장은 계속됩니다. 완성을 목표로한 변화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성화의 욕망은 성령께서 계시는 한 끓는 용암입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성능 좋은 차라도 운전자가 없다면 소용없듯이, ‘자아’가 성령의 주도하심에 순종하지 않으면 언제나 초신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변화의 부르심 앞에서 꼿꼿이 ‘나대로 행진’을 계속하며 순종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고집’은 성화를 차단하는 ‘강적’입니다.

신앙 생활은 공동체 생활입니다. 나와 공동체는 별개일 수 없습니다. 공동체를 따라 함께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과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함께 함을 거부하려 하는 내 안의 고집 때문입니다. 순종하며 공동체와 함께 하면 속으로 앓고 가는 스트레스는 약이 됩니다. 편안한 쥐와 약간의 스트레스를 주는 쥐를 실험했답니다. 얼마후 건강도를 체크해보니 스트레스 받는 쥐가 훨신 건강하다는 최근 과학 보고서가 있습니다. 주 3-5회 꾸준한 운동을 취미가 아닌 ‘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치고 즐거이 하는 분은 별로 없습니다. 내 안의 고집을 꺾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는 건강을 보장하는 ‘명현 반응’과 같습니다.

이것을 동의하신다면 공동체를 따라 함께 움직여야 하는 명현 반응때문에 괴로워마시기 바랍니다. 공동체가 있어야 다른 사람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생명력있게 성장하는 성화의 열매를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가 있더라도 참고 인내하시면서, 내가 아닌 남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헌신을 조금씩이라도 헌신해 보시기 바랍니다(고전10:24, 33)

특히 공동체 안의 행사나 운동, 또는 약속이나 세세한 훈련 지침이나 부탁 등에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지면 제약 상, 한 예만 든다면 카톡 섬김입니다. 카톡 반응을 ‘섬김’으로 표현함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카톡이 삶의 통신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카톡안에서 희노애락을 느끼죠. 반응을 해야 할 때는 성의있고 신속하게 주고 받으면 기쁨을 느낍니다. 만일 기대밖의 분이시거나 보고배울 직분자 분이라고 생각되는 분에게서 이런 멋진 반응이 오면 행복함도 느낍니다. 이타적인 섬김은 여기에서도 필요합니다. 반면 말이 짧고 성의가 없거나 적절한 타이밍에 반응하지 않는 경우는 불편함을 넘어 불쾌함도 느낍니다. 때를 놓친 경우는 적절한 사과와 양해를 구하는 말과 함께 성의있게 반응하신다면 얼마든지 이해와 마음 편함을 줍니다. 저는 카톡 섬김도 영성 훈련에 속한다고 확신합니다. 남의 유익을 위해서 나를 비우지 않으면 절대로 이 섬김은 지속적으로 성실하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목장들 안에서 누군가 카톡으로 섬기고 계실 때 응답 없거나 반응이 적절치 못하여 힘들어하신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옵니다. 사연들이 다 있으시니까 그러시겠지만 조금만 더 힘써 보시기를 바랍니다. 타이핑이 어려우신 분들, 무슨말을 써야할지 모르겠다는 분들, 너무 바쁘신 분들...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만 더 옮겨 보십시오. 말씀(요13, 고전10)에 순종하여 그러려니 해 보십시오.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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